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부치 게이조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파일:0401201010095348700053487018697.jpg|width=100%]]|| ||내각총리대신 시절인 [[1998년]] [[10월]], 도쿄 영빈관에서 일본을 공식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악수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한일 파트너십'이라고도 불리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痛節な反省と心からの謝り)'를 했다. 오부치는 한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외교적 수사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취하기 위해 제법 노력한 총리였다. 한국에도 나름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수상 재임시기 한일관계는 원만했다. 이후의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등과 함께,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 총리들 중에서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대표적 사례.[* 다만 하토야마 총리와 간 총리는 민주당 계열 출신의 총리들이었고, 때문에 오부치는 자민당 출신 총리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국과 가장 잘 맞았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수상 재임 이전에도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당시엔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이었으며,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의 정체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총리 시절인 1998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당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방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제강점기|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가해자=일본, 피해자=한국, 그리고 사죄'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표현을 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206_19498.html|해당 영상]]. 이전에도 일본의 사과에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이 있기는 했지만, 둘 다 한국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대중 오부치 선언]](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 내의 사과는 한국을 지칭한 사과라는 점[*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사과였다.], 기존의 담화형식이 아닌 __공식문서화__ 했다는 점, 자민당 보수정권의 사과라는 점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사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자민당 내부 강경파들은 이런 총리의 행보에 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보면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이 수준까지의 행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외교란 결국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 김대중 대통령도 이 같은 일본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이후 [[일본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들은 딱 이 수준 혹은 더 못한 수준에서 사과 발언들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에게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추진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것이 11개 항목([[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98655&cid=43787&categoryId=43788|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의 핵심 내용과 43개 항목([[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98669&cid=43787&categoryId=43788|부속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을 위한 행동계획]])의 행동 계획으로 구성된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이다. 한국은 미래를 바라보고, 일본은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취지로 지금도 [[한일관계]]에서 대표적인 양국 협력 선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여담으로 오부치 총리는 김 대통령이 써준 '경천애인' 휘호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한일 양국 국민간의 사랑과 협력의 뜻도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나가는 김 대통령을 붙잡고 웃으면서 친근하게 말하기도 했다. [[http://me2.do/58O5cZIf|관련 영상]]. 또한 [[1999년]] 방한 당시에는 [[해인사]]를 방문해 [[팔만대장경]]을 돌아봤고([[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9/1778471_19514.html|MBC 뉴스]]), 동시에 일부 학생들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강연을 하였는데, 어색한 한국말로 "오늘은 고려대학교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youtube(DQMdrYeXLYM)] 그 외 오부치 총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여성 [[다우치 치즈코]][* 한국명 [[윤학자]]. [[목포]]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복지 사업에 전념하여 [[광복]] 전후 목포시에서 명망을 얻었다.] 여사가 [[전남]] [[목포시]]에 설립한 [[고아원]] 공생원에 [[매화나무]] 묘목 20그루를 보내기도 했고, 2008년 공생원 설립 80주년 행사에는 오부치 총리의 부인인 오부치 치즈코 여사가 초청을 받아 방문했다. 오부치 총리 본인도 생전에 공생원 방문을 희망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